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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유리로 둘러싸인 빛이 커졌다가 작아지는 것을 본다. 머리가 어지럽다. 아직 잠에 들어서 는 안 된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기 위해 창문 앞으로 간다. 창문을 열고 덧창을 위로 끝까 지 들어 올린다. 얼굴 가득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오고 한시적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나는 세 그루의 나무 사이 풍경처럼 보이는 저 멀리 언덕으로부 터 걸어오는 사람의 그림자를 본다. 사환은 강한 바람에 떠밀려 비틀대며 걸어오고 있다. 어딘가의 나무에서 쉬고 있던 새가 또 우는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으니 그 소리는 바람 소 리처럼도 들린다. 사환은 점점 커져 온다. 나무의 숲 사이에서, 보이다 말다 하는 길을 따 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가. 언덕을 넘어 언제나 기다리고 있던 그 세 그루의 나무 앞 에서 사환은 숨을 고르고 있다. 사환은 그 중 한 나무에 기대어 한참 동안 서 있다. 사환은 어깨를 떨며 소매를 얼굴에 가져간다. 그 동작은 추워서 입김을 부는 것처럼도, 뺨에 흐르 는 눈물을 닦는 동작처럼도 보인다. 나는 창문 앞으로 걸어가 일부러 덧창을 닫으며 사환을 지켜보고 있는 기척을 숨기지 않는다. 사환은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사환이 울고 있는 거라면, 그 이유는 자신의 슬픔 때문일까, 아니면 당신과 나의 편지 를 읽었기 때문일까? 편지는 언제나 봉해지지 않은 채로 사환의 손에 들려 왔으므로 어쩌면 그 동안 봉투 속 당신과 나의 편지를 사환은 죽 읽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사환은 곱은 손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좀 더 자연스럽게 편지를 건네기 위해, 손을 녹이려 손에 다가 계속 입김을 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사환은 드디어 이쪽으로 걸어온 다. 거센 바람에 등불의 그림자가 등 뒤에서 뭐라고 말하기 힘든 모양으로 쉴새없이 일그러 지고 있다. 나는 덧창을 닫는다. 그리고 양쪽 창문도 하나씩 닫는다. 등불의 그림자가 창문 에 비쳐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환과 겹쳐진다. 사환은 검은 불길 속을 헤치고 이쪽으로 걸어 오고 있다. 사환은 점점 커지고 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사환이 입은 옷자락이 휘날리 며 아상한 굴곡이 드러난다. 필시 몹시 춥고 지쳐 있을 테지. 몹쓸 짓을. 내가 이렇게 생각 하는 것처럼 당신 역시 생각하고 있을까? 이제는 그만 해야 한다고. 그러나 사환이 아니라 면 편지는 당도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가 있는 곳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까닭이다. 사환은 비틀거린다. 사환은 수십 번, 수백 번을 오고 간 길 위를 자동적으로 걷는다. 당신과 나는 사환이 편지를 들고 문을 나서 창밖으로부터 멀어지며 언덕을 넘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사 환은 천천히 걷고, 천천히 걸으면서도 멀어지고, 멀어지면서도 점이 되어가고, 그리고 시야 에서 사라지고, 사라져버리고, 그리고 한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점으로 나타나고, 나타나서 가까워지고, 그리고 사환을 기다리며 창문 앞에 서 있는 당신-또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 전 에 당신과 나는 창문 앞을 서성이다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가. 창문의 문을 열었다가. 닫 았다가. 앉아서. 사환이 오면 답장을 바로 건네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다. 그러나 편지를 다 쓰기도 전에 사환은 문을 두드려 올 것이다. 여느 때처럼. 사환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여기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사환은 새가 우는 소리를 흉내 내는 벨을 세 번 흔들 것이 다. 그 소리가 들릴 것임을 알고도 나는 깜짝 놀랄 것이다.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일 것이 다. 사환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듯이. 책상 위에 놓인 쓰다 만 편지를 곤란한 듯 쳐다보면서. 그 편지는 아홉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 처음부터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