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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사환은 나의 편지를 기다리며 나무 아래 기대어 서 있다. 내가 편지를 마저 다 쓰고 나면 사환은 당신에게 그것을 전달할 것이다. 나무 아래에서 사환은 여기 오기 전에 그랬던 것처 럼 소매로 얼굴을 훔치고 있다. 나는 아까 문간에 서 있던 사환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의 얼굴은 모르지만, 그가 입은 옷, 모자, 그리고 그의 신발에 묻은 진흙과 편지를 들어 내미는 그의 붉게 부르튼 손 같은 것을. 그런 사환의 모습은 눈앞에 잔상처럼 남아 좀처럼 사라지 지 않아, 나는 편지 너머 당신의 모습을 사환의 모습에 겹쳐보기까지 했다.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쓰는 척을 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창문을 두드려 사환을 부를 것이다. 또는 깍깍하고 나무 위 새가 우는 것처럼 신호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편 지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내 편지를 기다리며 또는 기다리지 않더라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못했을 것이라 상상한다. 편지를 쓰는 일은 이미 머릿속에 있는 곡조를 따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반 위 손가락의 움직임으로부터 음계를 유추하는 일과도 같다. 당신과 나는 이미 그 음계를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외우고 있다. 나는 사환에게 그 음계를 불러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나는 창문 가까이로 가 언제나처럼 같은 장소를 서성이 고 있는 사환의 움직임을 손가락으로 쫓는다. 그 음계를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사환의 손가 락은 너무 얼어 있어 편지를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우는 것처럼, 손을 얼굴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사환의 작은 머리에 비해 커다란 모자는 사환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있는지 아닌지 볼 수 없게 만든다. 나는 사환의 모자를 손가락으로 따라다닌다. 그 손가락 의 움직임은 우리가 외우고 있는 음계와 흡사하다. 나는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책상 앞에 와 앉는다. 사환을 부르기에는 아직은 너무 이르다. 사환은 좀 더 밖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마음에 몹시 아픔을 느낀다. 내가 답장을 기다리는 사람이던가? 내가 편지를 쓰는 사람이던가? 나는 자주 헷갈려 한다. 나는 손가락으로 횟수를 세어 본다. 나는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편지를 써야 하는 사람. 당신은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 사 환이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그만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책상에 앉은 당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편지를 기다리고 있을 당신의 모습을. 나는 다시 창문 앞으 로 간다. 나는 지금 당장 사환에게 당신에게 줄 편지를 건네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너무 이르다. 나는 손톱을 세워 창문을 긁는다. 이 기다림의 시간. 고통의 시간. 하늘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곧 비가 내릴 것만 같다. 비가 오면 당신에게 편지를 줄 수 없나. 편지지가 젖고, 잉크가 번진다. 그러면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다. 꽈르릉. 저쪽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번쩍 하고 하늘이 빛난다. 멀리서 비가 이미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이곳 창문에 아직 빗방울이 닿 지 않은 것 뿐, 여기에도 비는 내릴 것이다. 여기는 비에 젖을 일이 없다. 그러나 사환은 비 에 젖겠지. 추운 몸이 더 추워지면서. 입김이 나고. 커다란 모자가 점점 축축하게 젖어오면 서. 무거워지겠지. 사환은 점점 더 한발을 떼는 일을 힘겨워하게 될 것이다. 사환이 걷는 길 이 젖고. 사방에서 안개가 뿌옇게 피어오르고. 빗소리에 방향을 알 수 없게 되고. 거기서 그 대로 가만히 주저앉게 되어.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오지 못하고 거기에 가만히. 어느 특정 되지 않은 나무 아래에서.